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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조선일보(The Chosun ILbo)

by 오버그라운 2025.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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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The Chosun ILbo)

대한민국의 조간 일간 신문으로 1920년 일제강점기 중 문화 통치기에 언론 탄압이 완화되었을 때 첫 발간되었으며, 2017년 6월 24일 대한민국 최초로 지령 30,000호를 넘었으며, 2020년 3월 5일 창간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신문의 논조와 정치적 성향은 국내의 제도권 신문들 중 가장 강경한 보수, 우파, 반공주의이며, 실제 대내외적으로도 보수주의(2019년 12월 21일 사보에서 방상훈 사장이 신년사에서 조선일보를 "보수 언론"으로 언급한 내용이 있다.) 성향을 공개적으로 표방하였고, 한국의 보우 우파 신문 3대 장인,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조중동) 중에서 언제나 첫 번째로 꼽히는 언론이기도 하다.

2020년대 이후에도 최소한 신문 업계 내에서 만큼은 국내 최고 영향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신문의 사양산업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조선일보 또한 다른 매체들에 비해 영향력이 급격히 뒤처지게 되어 과거처럼 '언론의 선두주자'의 이미지는 이제 아니다.

1990년대 후반 시작된 인터넷의 보급화, 2000년대 후반부터 모바일 혁명 이후부터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면서 방송사, 포털사이트 등에서도 영향력이 뒤쳐지게 되었고, 대부분의 매체 신뢰도 및 영향력 조사에서 10위 언저리에 머물게 된 형편이고 이제는 신문 업계 내에서만 최고 수준으로 꼽히고 있고, 이후엔 자회사인 TV조선 종합편성채널을 통해 방송계에 진출하여, 그룹 차원의 매체 영향력 유지를 꾀하고 있다.

언론사 매출 순위에 2011년 동아일보에 한차례 1위를 내어준 것을 제외하면 2000년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매출 기준 신문 업계 1위를 달리고 있지만 2002년과 2022년의 매출 규모를 비교하면 20년 만에 약 4,817억에서 약 3,219억 원으로 약 32%가량 매출이 감소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참고로 한국은행에서 제공하는 물가 상승률 지표를 감안하면, 2002년 기준 매출액인 약 4,817억 원의 2022년 기준 화폐 가치는 약 7,700억 원인데, 이를 보면 조선일보의 실질적 매출 규모가 약 20년 만에 반토막이 된 것임을 알 수 있으나 이는 액수의 절대 규모가 조금씩 다를 뿐 다른 신문사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박정희 집권 시기인 1960~70년대에는 동아일보는 '2 위없는 1위 신문'이라는 평가를 들을 만큼 압도적인 영향력과 판매 부수를 자랑했고, 이를 따라갈 만큼 독보적인 1등 신문은 아니었지만, 박정희 정부와 깊게 결탁하는 한편, 이를 통해 마련한 자금력을 동원하여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한국일보와 나란히 '2위 그룹' 위치를 공고히 하게 된다.

이후 조선일보가 급성장하여 신문 업계의 선두에 서게 된 계기는 신군부 하나회(전두환과 노태우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낸 대한민국 군대를 근본부터 흔들어 놓았던 비밀 결사 조직) 일당의 12.12 쿠데타와 전두환의 집권이었다.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때 신군부(대한민국 육군 내 사조직 하나회를 중심으로 반란과 내란을 일으킨 전두환 정부를 세운 군대 내부 집단을 이르는 말)가 광주 시민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직후인 1980년 5월 26일,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계엄군은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면서 학살 행위를 열심히 두둔했다. 이후에도 조선일보는 전두환 신군부에 적극 영합하면서 피해를 보지 않았고, 이 덕분에 전두환 정부 시기에 가장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하였다.

또한 조선일보가 1980년대에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언론통폐합이었는데, 당시 조선일보의 주요 경쟁지인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방송사인 동아방송과 동양방송을 KBS에게 강제로 헌납했고, 한국일보 역시 자매지인 서울경제신문의 사업을 접어야 하는 등, 모두 엄청난 자산을 뺏긴 반면, 조선일보는 일부 개혁 성향의 기자들만 해직시키는 선에서 처리했고, 전두환 정부에 깊이 참여하여 지속적 동반자 관계를 형성해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전성기는 1990년대로 꼽을 수 있는데, 1987년 6월 항쟁으로 언론 자유화가 되고 지면 제한이 없어지자 의욕적인 확장에 나서서 발행 부수가 200만 부를 넘겼고(여기서 감안할 점은 온갖 사운품에 전단지 수준으로 뿌려대서 유료부수 규모의 거품을 유지한다는 사실이다.), 보수 정치권이나 경제계와 결탁하여 촘촘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당시 폭발적으로 팽창하던 미디어 광고 시장의 수혜도 톡톡히 누렸다.

특히 1987년 민주화 이후부터는 김대중을 적극적으로 비토 해서 '반 DJ정서'를 고착시키는 한편,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을 적극적으로 편들어 주었고, 당선되면서 매체 영향력을 입증하며 승승장구했고, 대통령 당선된 바로 다음날 서울 흑석동에 있는 조선일보 방우영 회장의 집을 방문하여 만찬을 함께 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언론 통제도 누그러질 때라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은 덤이었고, 중앙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다 같이 200만 부를 넘겼기 때문에 혼자 독주를 못했지만, 영향력으로 보나 매출액으로 보나 이때만큼의 전성기는 없었다.

이런 전성기 시절에도 조선일보가 능력 있는 기자들을 많이 보유했던 것과는 별개로 오보를 많이 냈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그렇게 1997년 대선에서도 조선일보는 이회창과 이인제를 놓고 이회창을 선택했고, 한동안 이인제가 승승장구해서 지지율이 이 회장을 크게 앞섰을 때도 중앙일보와 합작해서 이회창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기도 했지만, IMF 외환위기가 한창 닥쳐왔던 시기라서 표 분산을 완전히 막지 못한 채로 결국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발행부수가 200만 부를 넘을 정로도 영향력이 강력했기에 국민의 정부를 적극적으로 견제하고 비 토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2001년부터는 동아일보도 보수 진영에 본격적으로 합류하며 이른바 조중동 3사가 전부 한나라당 이회창을 밀어주게 되었다.

조중동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정착한 것도 이때부터였으며, 절정에 이르렀던 2001년에는 발행부수가 248만 부에 달했고,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을 당선시키지는 못했지만, 각종 이슈를 만들어내면서 참여정부의 지지율을 하락시켰으며,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큰 역할을 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이후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밀어주면서 당선시키는데 공을 세웠고, 종편 출범 이후부터는 TV조선 또한 고령층 보수 유권자들에게 꽤나 강력하게 어필하면서, 여전히 종이신문 자체 발행부수에 비해 보수층 내부에서 만큼은 높은 매체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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