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2월 경부터 1975년 1월 초에 일어난 박정의 정부 초유의 언론탄압 사건으로 흔히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라고도 불리는데 미리 계약된 광고들이 모조리 해약되어 광고면이 텅 빈 상태로 나갔기 때문에 이렇게 칭하며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광고 신청을 촉구하는 문구를 인쇄하였다.
1974년 겨울부터 동아일보의 광고면이 하나둘씩 비워지기 시작했는데, 당시 광고는 예약제였기 때문에 미리 동판을 만들고 강판하는 과정을 거쳤는데 예약한 광고주들이 돌연 광고를 철회하면서 미리 제작해 둔 광고동판을 다 깨부숴 버렸었다.
당시 유력 일간지였던 동아일보는 일주일치 분량의 광고를 예약받는 환경이었는데 순식간에 일주일치 광고가 빠지면서 그 자리를 급히 채울 여건이 안되었다.
광고거부 이전인 10월 24일에는 동아일보가 아예 배포되지도 못했으나 다음 날 하루 지난 신문을 배달하게 되었다는 사과문과 함께 배포되었고, 이에 동아일보 기자들은 그날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투쟁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곧 군사정권의 압력으로 이어졌고 대기업들이 광고계약을 취소하기 시작했다.
광고 중단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말할 수 없으나 대략 1974년 12월 16일부터 큰 광고들이 빠지기 시작해 작은 광고들로 대체되기 시작해서 본격적인 시발점이 된 12월 26일 자 신문에는 이 사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백지광고'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12월 27일에는 PR팀 명의의 호소문이 신문 3면에 3 단통으로 실렸으며, 12월 28일부터는 후술 될 독자들의 개인광고 행렬이 시작됐고, 12월 30일 자에는 독자들의 성원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광고 신청자들의 명단을 제일 큰 광고규격인 5 단통으로 6면에 실었다.
1975년 1월 1일부터는 신민당, 정의구현사제당 등의 언론탄압 규탄 성명서가 실렸으며 같은 날 실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익명 격려광고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을 물꼬로 시민들의 응원 광고가 늘어나기 시작해 1월 3주 차 경에는 백지광고면이 사라졌다.
이 사건은 유신정권의 사주에 의한 중앙정보부의 탄압이 원인이었는데,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중앙정보부가 공권력을 발동해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을 조직적으로 탄압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중앙정보부는 1974년 동아일보와 계약한 광고주들을 불러 광고를 게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자유언론의 모습을 성실히 수행했던 동아일보는 유신정권에게는 눈엣가시인 존재처럼 느껴졌는지 광고주였던 기업들에게 은근슬쩍 압력을 넣어 광고를 해약하라고 한 후에 광고가 모조리 빠져나갔었는데 광고수입으로 벌어먹는 신문사 입장에서는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아일보 구독자들이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빈 광고면에 작은 개인광고들을 넣기 시작했고 보통 신문 한 면을 세로로 3.4cm X15단, 가로로는 3cm X 12단으로 쪼개는데 전면광고가 없던 당시에는 아랫단의 5단 광고, 업계에서는 흔히 5 단통이라고 하는 크기의 광고가 가장 큰 광고였으나 통째로 빈 이 공간을 쪼개고 쪼개서 한 줄이 간신히 들어갈만한 크기고 독자들이 광고를 냈던 것이고, 다수 공모자들로부터 투자를 받는 크라우드펀딩과 비슷한 방식이었다.
그렇게 1975년 새해가 밝고 빈 지면들은 대다수 시민들의 자비광고로 채워졌고, 정권의 의도와는 다르게 다시 광고면이 채워지면서 상반기 말에는 다시 광고 예약이 들어오면서 정상화가 되어갔다.
이 신문사 황규인 기자가 쓴 기사에 따르면 자비광고 1호 독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고,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도 1974년 성금을 모아서 동아일보에 후원했다고 한다.
광고해약사태는 정상화가 돼 가는 듯했지만 내분은 끊이지 않았고, 1975년 1월에는 자사의 라디오 방송국 동아방송(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폐국)의 광고가 철회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결국 그 해 3월 동아일보 경영진은 일부 부서 폐지와 함께 기자를 해고했으나 일부 기자들은 동아일보 편집방침과 다르다는 이유로 해직되었고, 광고해약사태로 충격을 받은 경영진이 정권 편을 든다고 항의하며 제 발로 나간 기자들도 있었다. 해직 기자들은 동아자유언론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하였고 이들을 주축으로 13년 뒤인 19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다.
다른 한편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도 같이 진행됐는데 1975년에는 해직 기자들이 동아일보는 상대로 '해고처분 무효 확인소송'을 냈지만 1979년 1월 대법원은 '경영상 문제'라며 회사손을 들어줬고, 세월이 흘러 2001년에 국무총리실 직속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동아투위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했고 2006년 동아투위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 진상 규명을 신청하자 위원회는 2년간의 조사 끝에 2008년 보고서를 발표하게 됐다.
이에 동아일보 측은 불복하여 2009년 3월 서울행정법원에 진실규명 결정 취소 소송을 내자 2010년까지 1~2심 전부 동아 측이 패소했다가 2013년 대법원이 파기환송을 내려 서울고법으로 돌려졌고 동년 6월에 서울행법으로 다시 갔다가 2014년 1~2심, 2015년 대법원 모두 동아일보의 손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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